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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사드 ​     Cast. 다이바 나나, 호시미 준나

    카군 @kakun88_revue

사드 후작

장 폴 마라

  #1

  호시미 준나는 밤에 잘 일어나지 않는다. 호시미에게 있어 잠이란 최대한 빠르게 잠들었다 최대한의 효율로 깨어나는 것이었다. 무대소녀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인간 호시미 준나에게 꿈이란 사치였다. 꿈이란 무엇인가? 꿈은 몽상, 꿈은 희망. 호시미에게 중요한 것은 후자다. 전자는? 그저 휴식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꿈이란 개운하게 일어나면 그 때부터 꾸면 된다. 최대한 명징한 정신으로. 이 현실에서.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꿈은 그런 손속 따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 맞는 말이다.

  특히 전자로서의 꿈은 더더욱.

 

  #2

  호시미 준나는 정확히 새벽 2시 43분에 일어났다(초는 시계에 표시되지 않아 모른다). 이마와 가슴엔 식은땀이 흥건하다. 다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 쉰다. 이불에 배어든 살내음과 라벤더 향 섬유유연제, 그리고 나무 냄새. 그러다가 몇 초도 되지 않아 도로 눈을 뜬다. 문득 가슴께에 거미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가려움이 올라온다. 처음엔 가슴이더니 이번엔 손목이다. 호시미는 파자마 단추 사이로 손을 넣어 환부를 긁는다. 몇 번 긁으니 가려움은 슬며시 사라진다.

  아, 이거 글렀구나.

  호시미는 잠을 판별하는 능력은 좋은 편이다. 이제 잠은 이미 도주한 지 오래고, 체포하러 뛰어봐야 허탕일 것이다. 지금이라면 이미 잠과는 작별하는 게 더 나았다.

​

  밤의 세이코우칸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가끔 거실에서 누군가가 야식이라도 만들려고 부시럭대거나, 아니면 방에서 애인들끼리 밀회를 나누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낮게 속삭이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론 조용하다. 에어컨만 낮게 웅웅대며 돌아간다. 세이쇼의 학생들은 대체로 이 시간엔 잠이 들곤 한다. 이쯤엔 이미 깊이 잠들어야 아침에 개운히 일어나 루틴을 시작하니까. 호시미는 몸을 일으키고, 머리맡에 둔 안경을 더듬거려 찾아 쓴다. 옆을 돌아본다. 다이바는 세상 모르고 자는 중이다. 참으로 기괴한 자세다. 저러고 어떻게 자는가 싶지만, 사람 사는 것도 살기 나름, 잠자리 버릇도 사람 나름이니 하고 오늘도 넘겨본다. 그러면서 슬리퍼를 대충 찾아 신고, 침대에서 일어선다. 삐걱대는 소리는 최대한 억누르면서, 호시미는 책상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집어 들고 방을 나선다.

 

  #3

  아, 이 가려움. 이 가려움-

  호시미는 부엌의 의자에 앉아 조용히 종이뭉치로 시선을 옮긴다. 천천히, 그녀는 머릿속으로 대사를 다시 되새긴다.

  열이, 열이 내 머리 속에서 곤두박질치고 피부는 뜨겁게 불타는 것 같다. 시몬느, 시몬느, 수건을 식초에 담가 봐라. 그러면 시원할 거야. 그걸로 이마를 식혀다오.

​

  벌써 며칠째 들여다보는 대본인지, 호시미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다음주에 있을 공연만 생각할 뿐이다. 소우다 선생님은 대체 뭔 생각으로 이걸 고른 거지? 애당초 주인공 둘 중 하나 이름만 봐도 바로 경고음이 울려야 정상인데! 호시미는 속으로 비쭉댄다. 몇 줄을 더 꺼들떠 보다가, 찬장에서 꺼낸 비스킷 하나를 갉작인다. 밀가루 냄새, 그리고 과자 사이에서 으적대며 씹히는 통밀 조각들. 에어컨이 강하게 돌아가는지 부엌은 은근 춥다. 무릎 담요라도 가져왔어야 할까 하고 생각을 해 보지만 다시 접는다. 장롱에 잘 접어다 놓은 담요를 꺼내 오려면 그 와중에 지금은 어떤 자세로 자고 있는지 짐작조차 안 가는 룸메이트가 깰 수도 있으니. 그리고 머리는 차가운 상태에서 더 잘 돌아간다 하지 않는가.

​

  그렇게 또 몇 줄을 넘겨보고, 또 넘겨본다. 시몬느, 시몬느!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다. 숨을 쉴 수 없어. 다미앙이 네 시간이나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처형대 옆에서는 무슨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사람들이 왁자지껄했어. 카사노바라는 녀석은 – 아 이런, 장이 뒤섞였잖아. 심지어 내 대사도 아니고! 시몬느, 시몬느 – 아 그래, 여기 있네. 시몬느, 내 몸 속에서 함성이 들린다. 시몬느, 나는! 혁명이다!

  아, 쥰나쨩!

  별안간 큼지막한 손 하나가 호시미의 손을 움켜쥔다. 나나? 일어날 새도 없이 호시미는 자신의 손이 가 있는 곳을 본다. 어라. 손목 등쪽이 새빨갛다. 그제야 시선을 들어 다이바를 본다. 얼굴에 걱정이 태산이다.

  아 이거 좀 위험한데.

 

  #4

  쥰나쨩, 괜찮은 거야?

  다이바는 불문곡직 호시미의 손등에 붕대 뭉치를 두툼하게 감았다. 열 날 때 이마에 붙이는 습포를 감고 그 위에 더 긁지 말라고 붕대를 한바탕 감은 것이다. 그러고는 촉촉하게 젖은 강아지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호시미는 그 눈빛이 되려 더 따갑다. 나나, 차라리 말로 뭐라고 하면 안 돼?

​

  으응, 그냥 신경성. 신경성일걸?

  쥰나쨩도 모르면 그건 좀 큰 문제인데?

​

  어 음 어흠 하고 소리를 내며 시간을 끌어 보지만 어째 적당한 답이 생각나질 않는다. 이럴 때만 날카로워선 참. 호시미가 속으로 한숨을 쉬건 뭐 하건, 다이바는 옆 의자에 털푸덕 앉아서 호시미가 쥐고 있던 종이뭉치를 빼앗아 후루룩 넘겨본다. 다이바의 약간 옅은 녹안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입가에 미소가 돈다.

​

  <마라/사드>네? 다음 수요일에 공연할 거.

​

  호시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이바의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아, 이 눈 본 거 같다. 아이죠와 칼을 맞부딪히던 그 눈이다. 호시미가 조심스레 자리를 일어나려니, 다이바의 손이 호시미의 어깨를 누른다. 가벼우면서도 무게를 실은 그 손아귀에 호시미는 꼼짝도 못 하고 도로 자리에 앉는다.

​

  어라, 쥰나쨩 어딜 도망가는 걸까?

  아니, 이제 슬슬 자야…지?

  쥰나쨩 거짓말 정말 못 하는 거 알지?

  뭔 소리래?

  쥰나쨩은 올바른 사람이라 거짓말 따위 못 하잖아, 그렇지?

  아이고 이런.

 

  #5

  꿈에서 계속 연습을 하게 된다구?

  으응, 하고 호시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이바는 호시미의 맞은편 의자로 옮겨 앉았고, 호시미는 앉은 그 자리에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져 널브러진다. 다이바는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

  그거 좋은 거 아냐?

  몇 날 몇일을 그러고 있으니 문제지.

  그러고보니 말이야.

  응?

  왜 작중에서 마라도 항시 쫓기듯 앞으로 뛰어나가잖아? 뛰어나가는 건지 밀려 나가는 건지 그 중간에 걸쳐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지. 호시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의미에선 그것도 쥰나쨩 배역 답지 않아?

  뭐?

  마라, 우리의 혁명은 어찌 되었나? 마라, 우리는 이제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네. 마라, 우리는 아직도 빈털터리, 약속한 개혁을 오늘 해 주게!

​

  호시미는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간신히 얼빠진 소리로 웃으면서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광경에 다이바는 샐샐대며 웃는다.

​

  가끔은 브레히트도 나쁘지 않다구?

​

  호시미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반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

  근데 이건 브레히트보단 아르토 쪽이잖아.

  아르토 쪽이 아니라 완전 아르토잖아.

  내 말은, 가끔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도 된다는 거야.

  근데 이건 그게 안 되는걸.

  아직도 흘려야 할 피를 생각하면 이 목욕통을 적시는 핏물 따위가 문제냐?

  잠깐, 방금 전도 그랬지만 넌 사드 역이잖아. 내 대사까지 다 외운 거야?

 

  호시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다이바는 별 거 아니란 눈치다.

 

  응, 다는 아니고 대강만? 그래야 나도 혼지 연습하더라도 주고받을 때 감정을 좀 더 다듬어서 볼 수 있잖아.

  난 그렇게 했다간 머리에 과부하가 올 걸…

  다이바는 침울해진 호시미의 앞으로 바짝 머리를 디민다.

  그러니까, 무대에 몸을 던질 땐 던지더라도 놓으면 된다는 말씀!

  하하. 한 번 해봐야겠네.

  쥰나쨩이 착하게 굴면 이 후작님이 무대 끝나고 놀아줄 수도 있는걸?

​

  다이바의 웃는 눈이 묘한 곡선을 긋는 것을 보고 호시미는 움찔한다. 언제 본 눈이더라? 호시미는 연녹빛으로 빛나는 야수의 눈길을 피하며 조심스레 뒤로 뺀다.

​

  잠깐, 나나? 너 그런 눈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짜 무섭거든?

  안타깝네. 쥰나쨩이 코르데 역이었음 채찍으로 날 쳐보기도 했을텐데?

  헤에, 그러면 역을 바꿀 걸 그랬나…?

​

  순간 끼어든 목소리에 둘은 삐걱대며 고개를 돌린다. 한 손에는 저번에 아이죠가 카구라에게 선물하려다가 졸지에 12개 들이를 시켰다면서 모두에게 하나씩 뿌린 미스터 화이트 머그잔을, 그리고 반대쪽 손에는 빈 그릇에 빵 자르는 칼을 올려 들고서, 사이죠 클로딘은 살짝 졸린 눈으로 둘을 쳐다본다.

  세이코우칸의 부엌엔 적막만이 흐른다.

 

 

  #6

  한동안 자수정 색 눈동자 한 쌍을 피하려 녹색 눈동자 두 쌍이 이리저리 튀어다닌다. 오밤중의 세이코우칸은 서늘할 정도로 조용하다. 먼저 입을 연 건 호시미다.

 

  아니, 저기 사이죠 씨, 그냥 잊어줄래…?

  으응, 졸려서 헛소리 나온 거야! 나나가 원래 그러잖아?

  아니 잠깐, 쥰나쨩 그건 좀 너무하지 않어?

  그래두 다행이네 둘 다.

  네? 두 쌍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름 활기차 보이는걸?

  아하하.

 

  사이죠는 조심스레 그릇들을 내려놓는다.

 

  야식?

  Oui. 잠도 깨버렸고, 출출해지기도 해서 빵이나 하나 잘라 올라가게.

 

  사이죠의 입이 불퉁해진다. 그러다 이번엔 그녀의 눈이 호시미에게로, 다음엔 다이바에게로 차례차례 시선을 돌린다.

 

  둘은 안 잘거야?

  잠 다 깼는걸?

  쥰나쨩도 못 잘 거 같구,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그냥 안 자려구.

  올라가.

  에에.

 

  다이바가 김빠진 소리를 낸다. 사이죠의 이맛살이 확 우그러든다.

 

  너희가 시끄러워서 깬 거거든!

  사이죠의 일갈에 둘은 움찔한다.

  그럼 사이죠 씨도 앉아서 대본 연습 할래?

  Non, je vais juste dormir.

  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사이죠는 그제서야 고개를 도리질하더니 다시 알려준다. 그냥 올라가서 잘 거야!

  하지만 그거 먹고 바로 자면 살 찔걸. 맞지, 나나?

  아 맞다, 게다가 다음주 계량 아냐?

  저기, 지금 연습하면 민폐라니까.

 

  사이죠의 미간이 한 번 더 구겨지더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식탁에 그릇들을 내려 놓는다.

 

  좋아.

  뭐가?

  연습을 원한다구?

 

  사이죠는 버터 나이프를 집어든다. 그걸 네글리제 치맛단에 숨긴다.

  나는 그가 떠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마에 맺히는 진땀도 보고 싶어.

  사이죠의 목소리는 떠는 듯 단조롭고, 단조로우면서도 힘있게 흐른다. 그러면서 그녀는 천천히 치맛단에서 나이프를 꺼낸다. 그녀가 읊조린다.

  이 숄 밑에 숨겨둔 비수를 갈빗대 사이에 꽂고 싶다.

  그리고 천천히, 우아한 손동작으로 그 나이프를 가슴에 품으면서, 사이죠는 둘을 바라본다. 사이죠의 안구 속에서 번쩍이는 자수정 한 쌍을 보고, 둘은 몰래 숨죽여 침을 삼킨다.

  양손으로 비수를 들어 그의 몸 속 깊숙이 칼날을 꽂고 난 다음-

  그러더니 사이죠의 손이 쭉 뻗어 나간다. 나이프를 든 손이 일직선으로 자신들 쪽을 향해 뻗어나오자, 다이바는 펄쩍 뛰어오른다. 호시미도 뒤로 움찔하고 허리를 제낀다.

  그 다음에 그가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대답을 듣겠어-

  부엌엔 침묵만이 흐른다. 그 살기 어린 표정으로, 사이죠는 웃으며 묻는다.

 

  그래서 언제 잘 건데?

​

  둘의 얼굴에서 얼이 순간 빠져나간다. 그러곤 1초. 2초. 3초- 호시미의 손이 빠르게 대본 뭉치를 집어든다. 다이바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

  아, 그럼 우린 자러 갈게!

  잘 자, 클로쨩! Bon. 에에. Bon 뭐더라-

  Bon nuit?

  으응, 그거! 여하간 잘 자!

 

  둘은 최대한 발걸음을 죽이고 계단을 우다다 뛰어 올라간다. 조금 있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세이코우칸은 다시 적막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어머. 너무 겁을 준 걸까? 사이죠는 키득대면서 냉장고를 연다. 사다놓은 프레첼이 있다. 이거나 가져가야지, 하고 꺼내려니 아래칸에 뭔가가 보인다. 오. 꽤 괜찮은 바움쿠헨이다. 바움쿠헨이 들은 플라스틱 그릇 뚜껑에 메모지가 있다.

텐도 마야 - 가져가지 마시오.

  사이죠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기가 돈다. 맛난 간식은 기본이오, 텐도 마야가 악에 받쳐 파닥파닥 뛰는 꼬락서니는 보너스다. 좋아, 오늘은 이거다. 메모지는 떼어서 휴지통에 던져놓고, 사이죠는 바움쿠헨을 그릇째 들고 방으로 사라진다. 들릴락 말락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이렇게 또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날의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Aijo Karen(아이조 카렌), Hoshimi Junna(호시미 준나), Tsuy-4-舞台少女心得 幕間 Butai Shoujo Kokoroe Makuai (무대 소녀의 마음가짐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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