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어 왕 Cast. 다이바 나나, 호시미 준나 외
비공개
리어 왕
코델리아
새로 시작된 연극의 배역이 적힌 벽보에는 꽤 많은 인원이 몰려있었다.
자신이 주역인가, 아니면 단역인가, 또 다른 연극의 배우인가.
어떠한 역을 맡게 되었는가를 기대를 하며, 모인 인파에는 물론 나나와 준나도 있었다.
《 리어왕 》
리어왕
- 다이바 나나
켄트
- 아이조 카렌
고너릴
- 텐도 마야
리건
- 카구라 히카리
코델리아
- 호시미 준나
"이번의 무대에 함께 주역이 됐네. 준나쨩 기뻐보여."
"그럼,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무대를 할 수 있으니까."
방방 뛰지도 활짝 웃지도 않았지만, 그 얼굴은 평소에 보이지 않는 기쁨은 확연했다.
그의 명언을 외우며 극의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꿈꿔온 무대.
기쁘지 않다면 필시 거짓이겠지.
"그 많은 극 중에 '리어왕'이라니, 기쁠 수밖에 없잖아."
"그렇네."
조용히 붙여진 벽보를 보며 서있는 모습은, 그들만의 공간과 같고, 몇 마디의 말로 서로의 신뢰와 마음이 보인다. 그것도 잠시 동안, 그러나 주변의 소음마저 잊은, 고요함은 어찌 보면 당연히 금방 깨질 터였다.
"준준! 바나나! 어떡하지, 마히루쨩이 다른 연극에 역을 맡았어, 마히루쨩 외롭지 않을까?"
"츠유자키씨가? 음...츠유자키씨의 반응은 어땠어?"
"자신은 외롭지 않으니까, 또 같은 방이니까. 서로 힘내자고..."
"마히루쨩도 강하니까, 분명 괜찮을거야. 외로우면 근처니까 만나러가도 좋고."
몸에 힘을 빼고 나나에게 붙어온 카렌에 말은, 항상 있던 일이였다.
카렌이기에 그 말에 거짓은 없다.
한명 한명에게 애정이 강한 카렌은 분명, 혹여나라는 생각에 괜찮을까라는 말을 자주한다.
외롭다, 이 마음에 가장 민감한 아이니까.
하지만, 쥰나도 나나의 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서로 다른 극이 되었다하더라도, 분명 외롭지는 않다.
그 누구도, 그래 그 누구도 말이다.
"그래, 그렇겠지! 고마워! 준준, 바나나!"
다시 활짝 웃으며 돌아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 나나의 눈에는 이전과 다른 빛이 들어차있었다.
◇
"거기 부분 다시! 목소리를 더 키워야지!"
"네!"
한 손에는 대본이 다른 한 손은 손동작을 한다.
감정을 담아 보내보지만, 이해하지 못한 감정은 이가 빠진 채 전달된다.
배우란 그 감정마저 녹아내야 되지 않는가.
“그들이 감히 그랬을 리가 없어. 그들은 그럴 수가 없고, 그러지도 않을거다. 이것은 살인보다 더 흉측한 일이 아닌가. 고의로 이런 난폭한 짓을 하다니, 어서 대강이라도 얘기해봐라. 어째서 자네가 이 같은 처벌을 받아야만 했나? 아니면 어째서 그들이 자네에게 처벌을 내렸단 말인가? 자네는 내 사신이 아닌가!”
“잠깐! 표정도 좋아, 몸짓도 좋아, 하지만, 감정이 부족해. 다시!”
“네!”
몇을 반복했지, 다음으로 넘어가다가도 멈추고 다시 반복.
중후반부에나 와서 처음으로 휴식을 갖는다.
주역이기에 엄청난 연습시간이 걸리지만, 이번에는 더욱 오래걸린다.
“하아..하아....”
소매를 들어 턱으로 흘러내려가는 땀을 훔치다.
그러다 뺨 옆에 닿는 이물감에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준나..쨩..?”
“자, 시원한 물이야. 마셔.”
떨려오는 손으로 부여잡고, 목울대를 움직여 넘긴다.
푸핫, 하는 숨을 내뱉는 소리가 퍼진다.
“...준나쨩, 어떻게하면 감정을 잘 실을 수 있을까.”
“....상대를 누군가에게 투영해본다던가?”
“누군가를..?”
“가령 나라던가? 하하, 장난이야. 나나, 지금 표정 이상한 거 알아?”
“어? 진짜?”
얼굴을 더듬어 가며 확인을 하지만, 알 수 없다.
그렇게 이상한 표정이었나?
“연습 재개한다! 자자, 일어나!”
누군가를 투영한다.
누구를 투영하지.
‘가령 나라던가.’ 그 말이 머리에서 재상영되며 떨어지지 않는다.
“제발 부탁이오. 나를 놀리지 마오. 나는 지극히 못난 바보 늙은이라오. 나이가 벌써 여든이 넘었소. 그보다 더 많지도 적지도 않다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제정신이 아닌가보오. 당신도 여기 있는 이 사람들도 다 알 것 같긴 한데, 확실치가 않구려. 여기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이고, 이 옷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오. 어젯밤 내가 어디에서 잠을 잤는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라오. 나를 비웃지 마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 부인은 내 딸 코델리아라고 생각되는데.”
눈앞의 선생님에 ‘누군가‘를 대입한다.
못 본지 몇 년인지, 얼굴도 잊어버린 막내딸을 닮은 누군가에게 애절히 손을 뻗는다.
부디 살아있기를, 코델리아가 맞기를, 내가 저주해온 딸이 맞기를.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그렇군, 눈물이로군. 제발 울지 마라. 네가 독약을 마시라면 마시겠다. 네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도 난 알고 있어. 내 기억에 네 언니들은 나를 무한히 괴롭힌 것 같은데, 그들은 나를 학대했으니 할 말이 없을 테지만, 너 코델리아는 나를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는 이유가 없지만, 너에게는 있지 않느냐.
그러니, 나는 너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두렵다.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좋아, 이대로만 가자.”
“감사합니다!”
대입하는 것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준나에게 감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못 하지만, 나중에 준나가 좋아하는 저녁이라도 만들어 주어야하나.
상대에 누군가를 투영하며 감정을 실으며, 모든 연습을 끝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아무리 연습해도 자잘한 실수들은 모여 큰 무언가를 이루었다.
완벽히 끝내지 못했다는 불안감과 함께 당일이 왔다.
다들 나나는 두껍고 많은 양의 의상을 모두 입고, 대기석에 앉아, 너무나도 긴 시간을 기다린다. 하나둘 끝나가는 준비는 시작을 알려온다.
"무대 시작하기 15분 전 입니다!"
대기석에 앉아있는 나나는, 눈을 감고 있다.
손에 주먹을 쥐고 몇 번이나 섰던 무대를 언제나 긴장하고.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며, 몇 번이나 다시 대본을 읽고 연습하고.
떨어지지 않는 이 감정은 어찌하면 좋을까.
"괜찮아, 항상하던대로, 할 수 있어."
몇 번의 무대인가 손가락의 10개로는 전부 셀 수는 있지만, 그래도 많은 무대에 올라 역을 연기했다.
지난 100회 성상제의 '첫'무대이외에도 몇 번의 무대는 있었다.
하지만 매번 몰려와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듯한 긴장감은 더욱 심해져갔다.
하나의 무대가 성공적이라도 다음이 괜찮다는 보장은 없어서.
지금 떨리는 목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은 아닌가.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듯한 그 모습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나나의 룸메이트에, A반의 학급위원장, 호시미 준나다.
"쥰나쨩?"
"나나, 분명 괜찮을거야, 라고해도 괜찮지....는 않겠지"
위로를 시도하지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머쓱한 듯, 웃는 그 모습은 풋, 하고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거나, 하지 안거나의 둘 중 하나를 항상 해 왔기에, 어설프다면 어설픈 행동.
옆에 앉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나나가 입을 연다.
"그, 쥰나쨩. 이 무대는 처음이야, 이 시간도 처음이고, 이 배역도 처음이야. 이 모든 순간이, 이 말조차도 모두 처음이야, 괜찮을까.. 망쳐버리지는 않을까...두려워서, 집어 삼켜지는 것 같아서. 불안해, 매순간이. 매번 오는 새로운 무대가."
멈춰버린 시간의 세상 속에 긴 시간을 부어왔다.
변함없는 나날을 기억이라는 사진기로 찍어내고, 출력하고, 새기고를 얼마나 반복해왔을까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미래는, 그저 두렵다.
1분후도 10초 후도 예견할 수 없는 인생, 변하는게 두려웠던 일상.
그 누구가 두렵지 않으랴.
오는 새로움을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해왔다.
이전의 100회 성상제의 '스타라이트'도 새롭다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마음한켠을 차지한 불안감은 지금까지도 잡아두고 있다. 그 때로부터 걸어 나섰다고 하더라도, 어찌하면 좋을지 그 무언도 잘 찾아낼 수 없다.
그건 마음에 담겨져 있을 뿐 의성으로 내뱉은 적은 없다.
"나도 그래, 혹시 내가 실수하지 않을까."
"준나쨩..?"
"나도, 두려워. 나도 불안해. 다음을 모르니까. 정답은 없으니까. 모두가 그런 마음이 있을거야."
사람은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불안감이 없을 수 없다.
자전거를 타는 순간도, 신호등 앞에 신호를 기다리는 순간도, 요리를 하며 칼과 불을 쓰는 동안에도.
그 어떠한 순간에도 두려움과 불안감은 그러하더라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가고 분명히 후회가 남고, 눈물이 남는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만족이, 그 이상의 행복도 남는다.
알지 못하면 분명이 나쁜 일도 있겠지, 그래도 알지 못 해서 오는 기쁨도 있다.
"나나는, 지금까지 어땠어? 지금까지의 무대, 지금까지의 일상. 지금 어때? 매일을 어떻게 지내고있어?"
"나는....나,는...그..."
"분명, 그 답이 나오면 분명 어느 정도 마음은 가벼워지겠지, 천천히 초조해 하지 말고, 꼭 함께 찾아줄 테니까. 괜찮아, 괜찮으니까."
한 번도 보지 못한,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그 깊이를 자랑하며 고민하는 얼굴도,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는 얼굴도 아닌, 그 둘이 적절히 섞인듯한 얼굴에는 확신이 들어차있었다.
◇
부저가 울리며 무대의 시작을 알린다.
무대에 세워진 왕좌는 드높고도 높은 곳에 자리 잡아, 그 눈부심을 자랑한다.
노쇠한 왕이 할 남은 일은 이 땅을 나누어 주는 것.
잘 할 수 있을거야. 해야되는거야.
왕좌의 손잡이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린다.
앞에 모인, 딸 역의, 왕자의 역을 맡은 모두를 보며, 웃음을 짓는다.
"이제 나의 은밀한 계획을 말하겠다. 거기 있는 지도를 이리 다오. 알다시피 나는 왕국을 이미 삼등분 해놨다. 이제 늙은 이 몸에서 근심걱정을 다 떨어버리고, 젊고 활기에 넘치는 자에게 국사를 넘겨주고 싶어서다. 죽을 때까지 홀가분한 기분으로 지내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
사위 콘월과 알바니, 두 사람 다 내 맘에 꼭 든다. 오늘 나는 두 딸이 차지할 지참금을 발표할 결심이다. 이렇게 해두면 후일에 싸움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 프랑스 왕과 버건디공은 내 막내딸의 애정을 서로 다투어 차지하기 위해 이 궁전에 구혼 차 장기 체류하고 있는데, 오늘 그 회답을 듣기로 되어 있다.
자, 내 딸들아, 오늘 부왕은 통치권과 영토 소유권과 국사의 근심 걱정을 몽땅 양도할 작정으로 있는데, 너희들 중에서 누가 나를 가장 극진히 사랑하느냐? 말해다오. 성품이 좋고 공로가 큰 딸에게 제일 큰 제산을 양도하겠다. 고네릴, 네가 맏딸이니 먼저 말해보아라.“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시력보다도, 무한한 공간보다도, 자유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훌륭하고 고귀하신 아버님은 그 무엇보다도 수중하신 분입니다. 우아하고 건강하게 아름답고 영예스런 생명만큼이나 소중하신 분입니다. 자식 된 자로서 받들 수 있는 최대의 사랑으로써, 아버지로써 여태껏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의 최대의 사랑으로써 아버님을 모시겠습니다. 내뿜는 숨결이 초라해질 만큼의 효성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 이상의 사랑으로 저는 아버님께 정성을 바치겠습니다.”
분명히 이 말에는 거짓이 있다.
하지만, 이 말에는 거짓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완벽한 연기, 감정.
잊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때 무어라 대답하더라.
그래. 아마, 분명.
“이 경계선내에 있는 이 선에서 여기까지, 그늘진 수풀과 기름진 들판, 그리고 물고기가 넘실대는 이 강물, 그 주변의 넓은 목장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영원히 너와 알바니의 후손들 것이다. 콘월의 아내인 내 사랑하는 둘째딸 리건도 할 말이 있으면 하라.”
허허로이 웃으며, 만족한다는 표시로 웃는다.
눈앞의 리건의 마야보다. 앉아서 나를 보는 관객들에, 속이 울렁거린다.
괜찮아보이는걸까. 괜찮을까, 티가 나지 않겠지.
“저도 언니와 한마음 한뜻이므로, 제 효심의 값어치도 언니와 같은 줄로 압니다. 진심으로 말씀 올립니다만, 언니가 저의 효심을 있는 그대로 전한 셈이 되었습니다. 다만 언니의 말에 보충해서 말씀드린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완전한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효도 이외의 즐거움이라면 그것을 원수로 삼아, 오직 아버님께 바치는 지고한 사랑에서만 가장 큰 행복을 느낌을 고백하겠습니다.”
그래, 그리 대답해야지.
사랑이 없어도, 욕(慾)이 있는 첫째와 둘째의 고너릴과 리건은, 있는 사랑 없는 사랑을 잘 조합해, 판단력이 흐려진 왕을 농간한다. 그 사랑은 가짜인가 진짜인가.
“자, 훌륭한 왕국의 나머지 광대한 3분의 1은 넓이로나 가치로나 기쁨을 주는 일에 있어서 결코 고넬릴에게 준 것 못지않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들에게 물려주마. 막내이긴 하나 언니들 못지않게 나에게 기쁨을 안겨다주는 코델리아, 포도밭을 많이 가진 프랑스 왕도, 기름진 목장을 가진 버건디공도 너의 애정을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마는, 언니들의 땅보다도 더 큰 세 번째 영토를 너의 소유로 하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말해보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뭐라, 없다고? 네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면, 영토를 그 무엇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네. 하지만, 제 입은 진실만을 전하고자하고 진실만으로 말하지 못 합니다. 자식의 도리로서 효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내가 사랑을마지않는 존재가, 나에게 사랑을 한다고 전하지 않고 그것이 당연히 해야될 일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가 한편으로 섭섭하겠지만, 아주 구석의 한편에서는 분노가 오를 것이다. 분노다. 지금은 분노다. 뜨거워진다. 막힌 가슴은 더욱 더 팽창한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어마시고, 다시 열을 내린다.
“너는 네 운을 걷어차고 있다! 정녕 그것이 진심인가?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마.”
“아버님, 아버님은 저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마땅히 그 답례를 올리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아버님께 복종하고 아버님을 사랑하며 아버님을 존경하렵니다. 언니들이 정말 아버님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어째서 남편을 얻었단 말입니까?
저도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마도 저의 배우자인 주인께서 제 애정과 관심과 의무의 반은 빼앗아갈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언니들 같이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께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네 진심이로구나. 네 멋대로 해라. 네 진정을 지참금으로 삼아라. 태양의 거룩한 광채에 맹세하여, 어둠의 여신 해커트와 밤의 신비에 맹세하여,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고 박탈하는 천체의 모든 작용에 맹세하여, 나는 아버지로서의 관심과 혈연관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너를 생판 타인으로 취급하겠다.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육친까지도 먹어치운다는 시디아의 야만인이 지금까지 나의 딸이었던 너보다도 더 깝고 측은하게 생각되어 차라리 그를 도와주고 싶어지는구나.”
손을 앞뒤로 휘저으며, 미간을 접는다.
아까는 분노가 올라왔다면, 이제는 질리기까지 한다.
광할한 영토의 1/3을 얻을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고, 그 분노까지 일컨다니.
거짓이 없는 그 진심이 두렵기 짝이 없다,
준나의 코델리아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다. 나도, 진심을 담지 않으면.
두려움을 떨치지 않으면, 투영을 하던 상대에 투영을 해도 무의미하다.
머리를 기댄 주먹을 펼치며, 상대를 향해 손짓을 한다.
기회를 주었지만, 매몰차게 내던진 딸아이에게, 분노와 매정함과, 배신감을 가득 담아 돌려준다.
“폐하!”
“쯧, 내가 어디 틀리기라고 했느냐, 닥쳐라, 켄트! 딸애와 내 분노 사이게 끼여들지 마라. 한때 나는 저 딸애를 가장 귀여워하여 저애의 보살핌만을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썩 물러가라, 보기도 싫다! 저애에게 아비로서 마음을 의탁하지 않는 한 이제 무덤만이 나의 안식처가 되겠구나! 프랑스 왕을 불러라. 누가 가겠느냐? 버건디공을 불러라. 콘원 공작과 알바니 공작은 두 딸에게 준 영토에다 셋째 딸에게 주려 했던 몫까지 나눠가져라. 코델리아는 자만심을 ‘솔직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자만심하고나 결혼하라고 해라.
나의 권력과 최고의 지위와 왕권에 따르는 모든 혜택은 두 공작에게 넘겨주련다. 나는 그대들이 마련해줄 100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매달 번갈아 가며 그대들의 집에 머무르고자 한다. 다만 국왕의 칭호와 자격만은 내가 보유하기로 하고 통솔, 수입, 그밖에 집행권은 사랑하는 두 사위에게 넘겨주겠다. 그 증거로 이 왕관을 줄테니, 두 공작이 번갈아 가며 사용토록 하라.”
옆에 대기하던 두 왕자에게 머리에 올려져있던 보석들이 박힌, 비춰지는 광원(스포트라이트)에 빛나는 왕관을 넘긴다. 그 고집을 어디까지 이어나가나, 그 반짝이는 눈이 어디까지 갈까.
그 모습은 일전에 보았던 모습들이기에 기대가 된다. 기대가 되는구나.
◇
이미 떠나보낸 딸의 시체를 끌어안고서, 슬픔보다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다.
그 분노는 노쇠한 몸으로는 버티지도 못하고, 행동을 할 수도 없다.
지금 그 자를 죽이면, 평온이 돌아올까.
그 아이를 편히 보낼까.
그 아이의 복수가 될까.
“그런 건 여기선 사소한 일에 불과하네. 두 분 경과 귀공은 우리들 편이니 나의 의도를 알아주시오. 이 엄청난 폐하의 불행에 대하여, 어떤 도움을 드려야 할지 충분히 생각해봅시다. 나는 이 노왕께는 살아 계신동안 나라를 통치하실 수 있도록 권한을 드릴 생각이오. 두분에게는 작위와 영토뿐만 아니라 이번 공로를 참작하여 여러 가지 특전을 수여할 작정이오. 우리 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공로에 대해서 상을 받을 것이며, 적들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오. 왕이시여! 보십시오, 이것을 보십시오!"
야욕이 가득한 자들은 그 죄를 돌려받듯, 야욕에 가득 들어찬 자에게 그 죽음을 마지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하더라도 아비되는 자의 마음을 고통과 슬픔만이 넘친다.
아무리 저를 매몰차게 학대하더라도 자신의 딸이 아닌가. 그러하더라도 사랑을 하지 않는가. 더군히 마지막의 아이는 자신을 받아들여주고, 맞이해주었지만, 그 야욕에 죽음을 맞이하고 단말마의 비명조차 외치지 못하고, 그 죽음이 거짓으로 덮히기만하였다.
지금 이렇게 죄스럽고, 사과를 하여도, 나는 이미 그 아이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밀어내고,
분노하였지 않는가.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다. 그 아이에게 감정에 휩쓸려 그 무엇하나 알지 못 했구나.
비통하다, 비통해. 원망하고, 원망스러워라.
이 감정을 무엇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까.
그 죽음을 애도하는 자는 부족하고도 부족하니라.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샘에서, 눈물을 찾아보지만, 흘리지 않는구나.
애석한 내 딸 아이야. 아아, 코델리아, 코델리아.
"아아, 불쌍한 내 딸을 목 졸라 죽이다니! 이제는 생명이 없구나, 없어, 없어! 개나 말이나 쥐 같은 것도 생명이 있는데, 너는 어째서 입김조차 없느냐? 너는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결코, 결코! 부탁이다. 이 단추를 빼다오. 고맙다. 이게 보이느냐? 코델리아를 보라. 보거라, 딸의 입술을. 저걸 봐, 저걸 보란말이다!"
원통히 외치며 쓰러진다.
모든 왕국을 잃었다.
모든 자식을 잃었다.
자신의 충신도 잃고, 남은 것은 작은 것들,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들지만, 흘러내린다.
비통하다, 비통해. 원망하고, 원망스럽구나.
내, 이 죽음에 담긴 그들을 저주하리라.
"폐하께서 기절하셨다! 폐하, 폐하!"
"가슴이 터질 것 같구나. 가슴아, 차라리 터져버려라!"
"폐하, 부디 정신을 차려주시옵소서!"
"그만두시게나, 폐하의 영혼을 괴롭히지 마시게! 아아, 폐하를 가시도록 내버려둡시다! 쓰라린 이 세상의 형틀 위에 오래도록 지체시키는 자를 폐하께서는 오히려 미워하실 겁니다.
"두 분의 유해를 운구해 나가시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전국민이 그분을 애도하는 일이오. 나의 두 벗은 이 땅을 통치하고 난국을 수습해주기 바라오."
"저는 이제 여행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폐하가 부르시니,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 비통한 시대의 가혹한 슬픔에 우리들은 복종해야만 하오. 마땅히 해야 할 말은 삼가고, 우리가 느끼는 것만을 말하기로 합시다. 가장 나이 많으신 분께서 가장 큰 괴로움을 겪으셨소. 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그토록 많은 고난은 견딜 수도 없거니와 그토록 오래 살지도 못할 것이외다. "
장승곡이, 진혼곡이 울리고, 자신을 애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니, 마음 편히 가겠구나, 가겠어. 그렇지 않느냐.
◇
그렇게 다시금 부저가 울리고, 막이 내린다.
차갑게 식은 바닥에 엎어지면, 머리도 함께 식어간다.
아, 나는 언제부터 리어왕인걸까. 나는 언제부터 열중했지.
나는 언제부터 두렵지 않았지. 시작부터? 아냐 그건 아니야, 떨려왔는걸.
중간부터? 어디의 중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이미 사라졌다.
연극이 끝나서인가? 그건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그럼, 왤까, 그건.. 그건 아마도, 아마도, 자신이 열중했기 때문이다.
시작하기 전에 두려워서 덜덜 떨다가도 무대에 들어서면, 서서히 사라져 그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무대를 시작하면, 즐거워진다. 기분이 고조되고, 무대에 녹아들어간다.
무언가 답이 보였다.
◇
완전히 내려진 막에, 몸을 일으킨다.
무거운 옷에 일어서기 버겁다.
"수고했어, 바나나쨩!"
"수고했어, 카렌쨩."
카렌이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선다.
옷의 먼지를 살살 털어내며, 모두가 서있는 중앙으로 간다.
손을 맞잡고, 모든 스포트라이트에 빛이 들어오며, 완전한 극의 끝을 알린다.
박수갈채에 뜨거운 열기에, 완벽이라고는 자신할 수 없는 무대였지만. 그 안에 답이 보였다. 다시 열기가 오른다.
인생은 울다가도 웃게 되는, 분명히 즐거웠던 기억이 잔뜩 남는, 기쁜 나날.
연극에 모든 배우가 고개를 숙이며, 끝난 안도감에 머리 한켠에 미뤄놓은 문제를 떠올렸고
나나는 불연듯 생각한 정답을 옆에 손을 잡고 인사하던 준나에게 전한다.
즐겁다. 불안했지만, 그 마음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즐거워진다.
그건 어떤 무대에서나 같았다. 막혀오던 숨도 어느 순간 뻥 뚫리고, 그저 열중하면 사라진다. 내가 이 무대에 서있다는 그 기쁨이 불안감을 없앤다. 즐거움이 그 자리를 밀어내고 들어찬다.
옆에 동료가 있다. 옆에 친구가 있다.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날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에 모두 털어놓았지만 조금 남은 잔존의 존재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변화가, 정말로, 두렵지 않다.
새로운 무대에 새로운 배역으로.
계절이 변하고 사람이 성장하고.
나쁘지 않다.
"쥰나쨩."
"왜, 나나."
"찾았어."
"...."
상대는 조용히 그 답을 기다려준다. 그럼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은 제 자리를 찾아가고, 기분을 전한다.
"분명 미래를 몰라서 우리는,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 갑작스런 변화에 두려워 할 수도 있어. 그래서 힘들지도 몰라."
막이 완전히 내리고 하나둘 무대를 떠난다.
어두워진 무대에는 각자의 말소리가 울린다.
그 둘의 말을 덮어버릴 만큼, 한명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들을 수 없게할려듯.
바닥에 떨어질듯한 드레스의 소매를 잡고 조용히 전한다.
"하지만, 그래도 알지 못하고 만난 미래가 즐거울거야, 그보다 더 웃을 수 있을거야, 그 기억을 덮을 추억들이 쌓일거야. 오는 미래, 알 수 없는 내일이라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순간들은 고민되고 불안하겠지만, 그 순간도 하나의 기억, 추억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무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아. 내일이, 새로움이, 괜찮아."
지나간 순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다에 파도가 치면, 바닥의 모래들은 그 파도를 남긴다. 가라앉아있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들도 저마다의 흔적을 남긴다.
없어져버리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그게 네 대답이면 분명 그게 맞을거야. 그걸로 좋으면 괜찮아, 전부 괜찮으니까."
"뭐야, 그게."
푸스스 웃는 얼굴에 떨어지는 방울들은, 고민의 흔적이자, 미래의 알림. 행복의....무언가겠지.
"저기, 나나. 나나는 지금 어때?"
"나는...지금, 내일은 또 뭘 할까 기대되서 즐거워! 아이들과 어떤 장난을 함께 할까, 또 어떤 무대를 준비하게 될까,“
“나나야말로, 그게 뭐야.”
불안도 하지만 그래도 즐거워.
내일은 또 뭐하지, 뭘 요리할까, 어떤 새로운 대본을 받을까.
무슨 즐거운 일이 있을까.
내일은 뭘 준비할까, 아무렇지 않는 잔잔한 일상은 나쁘지 않다.
고민의 끝은, 뭘까. 답은 스스로에게.
진정한 막을 내리고, 남은 잔념의 조각들은 그 존재가 더더욱 작아졌다.
분명 어떠한 일도 즐겁게 맞이할 힘이 되었겠지.
시간은 흐르고, 실수를 하고 불안할 것이다.
그러하더라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분명히 말이다.
당신도 나도 모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