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란도트 Cast. 토모에 타마오, 아키카제 루이
Gardener @fleuriste_
류
칼라프
땅으로 널브러진 젊은 여인의 모습이 애달팠다. 이제는 더는 일어설 힘조차도 없어 보였다. 계단 위 옥좌에 앉아 모든 이를 내려다보는 공주의 차가운 시선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있는 여인을 향해 닿았다. 바보 같은 것. 단지 이름 하나만 말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음을, 이름을 대지 않아 이 몸이 된 것이지. 공주는 눈처럼 희고 창백한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띠며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저 미천한 여인은 출신조차 천한 하녀였다. 이름이 류라고 하였던가, 공주가 궁금한 건 그녀의 이름이 아닌 주인의 이름이었다. 저자의 이름을 대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럼 나는 저 이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저 계집은 생사를 넘나들게 하는 고문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뭐, 그 주인은 동이 트는 동시에 목이 잘려 붉은 피를 뿜어내겠지만 말이다. 주인에게 아무리 충성스러운 하인이라고 한들 제 목숨보다 중요하겠냐는 말이다.
공주의 윤기 나는 긴 머리칼이 달빛의 받아 반짝이는 반면에, 바닥에 널브러진 채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공주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녀의 사방으로 흐트러지고 피에 엉겨 붙은 머리칼은 어둠을 그대로 받아들인 양 어둡기만 하다. 널브러져 있는 것만으로 만족을 못 한 건지, 냉철한 공주는 신하들에게 고문관을 데려올 것을 지시한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수군덕거리며 크고 작은 목소리로 같은 얘기만을 말한다. 저 왕자의 이름을 말하라고, 그러다간 진짜 죽는다고. 그러나, 죽을 때가 되면 용감해진다고 하던가. 솔직히, 이제 와서 형벌을 멈춘들,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이미 온몸이 아스러져 숨도 쉬기 힘든데, 이제 와 주인을 배신하고 그의 이름을 말한들 어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살겠느냐는 얘기였다. 공주는 자신을 노려보는 악에 받친 자수정 빛 눈동자를 보고, 쉽지 않을 것을 충분히 짐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무엇이 널 그리도 강하게 하는 것이냐."
공주는 이제 두려워했다. 저의 앞에 있는 자가 이제는 사람이라는 건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당당한 얼굴 뒤로 불헌 듯 불안한 표정의 스쳐 지나가는 게 왕자의 눈에는 보였다. 온 몸이 포박되어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칠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주저 앉아있는 상태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지언정 말이다.
"존경하는 공주님이시여, 그것이 궁금하신가요?"
비틀거리면서도 하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꼿꼿하게 고개를 들어 공주를 바라본다. 같은 여성인 저가 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였다. 백자처럼 희고 윤기가 흐르는 피부 하며, 비취옥을 닮은 녹색 눈과 금으로 비단을 뽑아야만 그나마 공주의 머리칼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금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화려한 머리 장식과 함께 흩날렸다. 어느 이가 저 자태를 보고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녀는 저와 공주 사이의 벽이 신분만이 아니라는 것에 서글퍼졌다.
류는, 공주의 향기로 가득 찬 아름다운 궁전에서 저 홀로 이질적으로 피비린내를 진동하고 있었다. 언제 맞았는지 왼쪽 어깨는 이미 살이 파여있고, 두 다리는 찢어진 째 허벅지 살이 덜렁거리며 피가 흘러나온다.
"저를 이렇게 버티게 하는 건 전부 사랑의 힘이랍니다."
"뭐라고?"
아, 안쓰러운 공주님.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지요. 저는 아직도 주인님의 그 따스한 미소를 기억한답니다! 그 미소 하나만을 믿고 저는 지금껏 수많은 고난을 버텨왔으니. 제 경솔한 행동으로, 내일부터는 주인님의 따스한 미소가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저는 내일이 오기 전 제 눈을 감을 테니까요..
칼라프. 그저, 이 한 마디만 말했으면 이 사단까지 오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제 주인의 이름은 칼라프 입니다. 친애하는 투란도트 공주님. 그자의 이름은 칼라프 입니다!'
이 한마디를 하지 않으려 얼마나 입술을 깨물고 버텼는지, 입술은 이미 터져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류는 차라리 저를 죽이던, 재갈을 물려주건 둘 중 하나라도 해달라 부탁했다. 이 비명을 사랑하는 임께 들려드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흉측한, 추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도, 비명을 들려 드려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으나 둘 중 어느 쪽도 얼음 같은 공주님은 받아 들어주지 않았다.
"이 밤이 지나면, 공주님은 저희 왕자님께 모든 사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 절대 제 주인의 이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윽..."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니, 분명. 분명, 공주님도 그이를 사랑하게 되실 테지요. 류는 웃으며, 군사 둘에게 양쪽으로 포위된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저의 주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공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주는 자신의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괴고 있던 손을 빼 들어 신하들을 향했다. 여봐라, 당장. 까지 나왔을 때, 땅에 널브러져 있던 미천한 계집은,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앞에 서서 공주의 명령을 경청하기 위해 뒤돌아 공주를 우러러보고 있는 장군에게 돌진했다. 장군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든 여인은, 장군이 저지하기도 전에 그 칼을 자신의 목 깊숙하게 찔러넣는다. 반동으로 휘청이던 몸덩이가 딱딱한 바닥을 향해 쓰러진다. 웅성거리던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며, 일제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어린 생명을,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꼼짝도 없이 바라만 본다.
"류!"
왕자는 지금껏 자신을 포박하고 있던 줄을 기어이 끊어내고, 자신을 붙잡기 위해 다가오는 병사들에게서 벗어나 달린다. 왕자가 달릴 때마다 그의 검고 긴 머리가 사정없이 흔들리지만, 왕자는 신경 쓰지 않고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하녀를 받아낸다. 상처투성이인 온몸에 당장이라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일단은 목 깊숙하게 박힌 칼부터 빼어낸다. 피 묻은 칼이 빠져나오자, 피가 쿨럭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하녀의 밤하늘이 가득 담긴 보라색 눈동자에도 달이 떠오르다가, 온통 왕자의 얼굴로 가득 찬다.
"어째서, 어째서 네가...!"
왕자는 류를 품에 안고서, 듣는 이 없이 절규한다. 이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절대, 절대 네 목숨을 앗아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너는, 너도 행복하게 살길 원했다. 지금껏 불쾌한 표정만을 유지하던 공주가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옷자락으로 입을 막고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왕자는 죽어가는 시녀를 감싸 안고 통곡한다. 놀란 채 바라보는 공주와 포효하는 왕자의 사이, 따스한 왕자의 품에서 하녀는 차갑게 식어가며 마지막 밤을 보내고 새로이 찾아오는 새벽을 받아들인다.
말할 수 있었음 좋았을 텐데. 아무리 길고 긴 밤이라 한들, 끝이 있고. 반드시 새로운 아침은 찾아온다는 걸. 그러니 괜찮다고. 전하고 싶었지만, 하필 목을 찔렀기에 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임의 품에 안겨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밤이 지나 왕자의 두 눈처럼 붉은 태양이 저 멀리서 떠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그제야 하녀는 마지막으로 미소짓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녀는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겨우겨우 실눈만큼 뜨고 있던 눈을 감는다. 그녀의 왼손이 왕자의 품속을 벗어나 차가운 궁정의 바닥에 닿자, 하늘에서 붉은 천이 나타나 하늘을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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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서야 왕자는, 뒤늦게 저의 모자람과 멍청함을 느꼈다.
나는 사랑을 위해서 이 가여운 아이의 행복과 젊음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가. 사랑에 눈이 먼 것은 이 아이나 나나 똑같은데, 이 아이나 똑같은데. 설령 그렇더라도 이 아이는, 늙은 나의 황제를 살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 지금 막 피어난 꽃봉오리를 제 손으로 꺾어버렸는데. 설령 이렇게까지 하여 공주를 얻은들, 나는 그녀의 얼굴 위로 류를 겹쳐보지 않을 수 있을까. 공주의 정오의 맑은 하늘 같은 눈을 보면서도, 찾아오는 새벽을 맞이하며 흐려지는 밤하늘 같던 류의 눈을 잊을 수 있을까. 비단결같이 윤기 있는 공주의 머릿결을 탐한들, 고생한 탓에 조금 푸석푸석했어도, 머리를 쓰다듬으면 복슬복슬한 것이 꼭 강아지와도 같았던. 그때의 정겨움을 잊을 수 있을까. 얼음 같은 공주가 언젠가, 언젠가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어도, 그때 조금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는 내 눈을 겨우겨우 바라보던 그 아이를 잊을 수 있을까 하고. 어리석은 자는 뒤늦게 제 결정에 조금의 의문을 가졌던가.
그러든지 말든지 낮은 밝아왔다. 죽은 여식의 얼굴 위로 밝은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토록 원하던 낮이 다가오고 있는데, 왕자는 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밤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리 길고 긴 밤이라 한들, 끝이란 있고. 반드시 새로운 아침은 맞이하더라.
